요즘 해외 드라마를 보면 참 재미있다. 오히려 재미없는 작품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화려한 영상과 정교한 컴퓨터그래픽(CG), 영화 못지않은 제작비와 완성도까지 갖췄다. 화면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CG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런데 이상하다. 모든 것이 훨씬 좋아졌는데도 나는 가끔 어린 시절 보았던 1980년대 미국 드라마들이 그립다. MBC와 KBS가 대체로 주말에 방영하던 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숨죽이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기억까지 함께 떠오른다.
아마도 그 시절의 드라마에는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압도적인 영상 기술이나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은 없었지만, 부족한 화면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부한 것이 있었다. 바로 어린 우리의 머릿속에서 완성되던 상상력이었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이런 논쟁을 벌이곤 했다.
"에어울프가 세냐, 키트가 세냐?"
지금 생각하면 참 엉뚱한 논쟁이다. 한쪽은 무장한 전투 헬기이고 다른 한쪽은 말하는 자동차이니 애초에 제대로 된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대 공중파에서 같은 시간대에 편성하는 바람에 치열한 시청률 경쟁이 벌어졌다.
비디오는커녕 텔레비전 한 대가 전부이던 집에서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가혹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고, 논쟁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당시 소년들에게 둘은 모두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생생한 '미래의 기계'였다.
헬기, 자동차... 소년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한 기계들
▲ ?1980년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 NBC 드라마 <전격 Z 작전>
ⓒ NBC
특히 <전격 Z 작전>의 키트(KITT)는 지금의 AI를 떠올리게 할 만큼 놀라운 존재였다. 키트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말을 했으며, 주인공 마이클 나이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인공지능 자동차와 인간이 한 팀이 되어 악당을 물리친다는 설정 자체가 당시 소년들에게는 그야말로 미래였다.
키트의 운전자는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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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어린 나는 잘생긴 주인공이 붉은 LED를 번쩍이며 검은색 폰티악 자동차를 몰고 나타나는 장면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런 키트를 몰고 세상을 누비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키트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바로 <에어울프>였다. 다양한 케이블 채널도 없던 시절, 양대 지상파 방송사가 주말 안방 극장을 두고 벌인 맞대결이었지만 전투 헬기인 에어울프는 한층 더 황당하고 매력적이었다. 초고속으로 날아오르고 실제 헬리콥터로는 꿈도 못 꿀 압도적인 비행을 선보였다.
▲ ?1980년대 큰 사랑을 받았던 미국 CBS 드라마 <에어울프(Airwolf)>
ⓒ CBS
그리고 그 조종석에는 주인공 스트링펠로 호크가 있었다. 배우 잔 마이클 빈센트가 연기한 호크는 당시 소년들에게 새로운 영웅이었다. 특히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과 어딘가 쓸쓸하고 우수에 찬 그의 눈빛은 어린 나에게 강렬하게 남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키트와 에어울프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복병이 등장했다. 바로 오토바이였다. 국내에 <독수리 특공작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스트리트 호크(Street Hawk)>다. 당시에는 극 중 등장한 오토바이 이름인 '검은 독수리'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1985년 미국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에는 무려 시속 300마일(약 480km)로 질주하는 초고속 오토바이가 등장했다.
▲ ?1985년 미국 ABC에서 방영되어 국내에서는 <독수리 특공작전>
ⓒ ABC
이쯤 되면 1980년대 미국 드라마 속 세상은 온통 미래 기술의 경연장이었다. 헬기, 자동차, 오토바이까지.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첨단 기계들이 등장해 정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우리 소년들은 그 기계들을 보며 꿈을 꾸었다.
'나도 저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언젠가는 저런 자동차가 실제로 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그때 우리가 과학자를 꿈꾸었던 이유도 이런 데 있었는지 모른다.
만능칼 하나로 위기 해결하던 사나이, 그리고 외계인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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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첨단 기기가 없어도 모든 위기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맥가이버>였다. 맥가이버에게는 거대한 무기도, 최첨단 자동차도 없었다. 대신 주머니 속 스위스제 만능칼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과 기지를 이용해 매번 위기를 빠져나왔다.
당시의 나에게 맥가이버는 단순한 액션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건네던 "할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지"라는 특유의 대사처럼, 그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를 몸소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나는 주말을 기다리며 맥가이버의 오프닝 음악을 입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빰빰빰, 빠바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주말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 ?미국 ABC에서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대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맥가이버
ⓒ ABC
그런가 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생경하고도 괴기스러운 공포로 우리를 사로잡은 드라마도 있었다. 바로 <브이>였다. 오싹한 음향의 오프닝과 함께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파충류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한다. 겉은 인간과 똑같지만 인공 피부가 뜯겨 나가면 그 아래로 파충류의 정체가 드러난다.
어린 나에게는 그 모습 자체가 기괴함이었다. 특히 외계인 간부 다이애나가 살아 있는 쥐를 산 채로 꿀꺽 삼키는 장면은 한동안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저런 괴물이 진짜 우리 곁에 살고 있으면 어떡하지?' 어린 마음에는 더없이 현실적이고 서늘한 공포였다.
1983년 시작된 <브이>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SF 드라마였고, 훗날 2009년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전격 Z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원작의 인기를 이어받아 2008년 새로운 시리즈로 다시 만들어졌고, 새로운 KITT에는 당시 배우 발 킬머가 목소리를 맡았다. 하지만 이 역시 한 시즌을 끝으로 종영했다.
▲ ?1980년대 초반 방영되어 국내외에서 파격적인 반응을 얻었던 NBC의 SF 미니시리즈 브이
ⓒ NBC
기술적으로는 원작보다 훨씬 발전했을 리메이크작들을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원작을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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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채워준 완벽함보다는 허술함 속에서 부풀어 오르던 그 시절 소년의 상상력이 더 그리웠던 까닭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아름다웠던 시대
돌이켜보면 1980년대 미드의 특수효과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헬리콥터가 날아가고, 자동차가 질주하고, 오토바이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장면도 지금처럼 실제인지 CG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순수했던 우리는 화면에 보이는 것이 실제 미래라고 믿었고, 그 안에서 마음껏 상상했다. 지금은 무엇이든 화면으로 만들어낼 수 있고, 상상한 것을 CG로 구현하는 데도 그리 많은 제약이 없다. 괴물도 만들 수 있고, 우주도 만들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와 자동차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 완벽해진 탓에 우리가 상상할 틈은 오히려 줄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 드라마에는 분명 허술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허술함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히 채워주었다. 화면 밖의 진짜 이야기는 우리가 완성했다. 키트를 몰고 악당을 쫓아가는 상상, 에어울프의 조종석에서 푸른 하늘을 가르는 상상, 맥가이버처럼 만능칼 하나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상상까지. 그렇게 우리는 화면 속 영상을 현실의 상상으로 채우며 저마다의 미래를 꿈꿨다.
며칠 전 난생처음 MBTI 검사를 해봤다. 결과는 INFP였다. 결과를 보고 피식 웃었다. 혹시 이것도 어린 시절의 영향일까?
▲ ?'INFP' 성격유형 결과는 어린 시절 미드를 보며 키워온 상상력의 결을 증명해 주는 듯
ⓒ 최호림
물론 MBTI 결과가 어린 시절 본 드라마 때문에 결정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는 상상력과 감수성의 한 조각에는 그 시절의 경험도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처럼 모든 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지는 시대에도 나는 가끔 그 시절 2% 부족해 보이던 드라마들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 키트가 말을 걸어오고, 에어울프가 하늘을 가르고, 검은 독수리가 도로를 질주하고, 맥가이버가 만능칼 하나로 위기를 해결하던 그 시절.
아마 내가 지금 그리워하는 것은 그 드라마들이 아니라, 그 드라마를 보며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소년 시절의 나인지도 모르겠다.
p ㉬ 모바일바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