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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10-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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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을 통해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제도를 마련하고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진행했다. 하지만 토지 소유주가 직접 일제가 정한 방식과 절차로 신고해야 했으며, 신고하지 못한 토지와 국유지는 조선총독부에 넘어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획득한 토지를 일본인들과 일본 자본에 헐값에 넘겼다. 특히 일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도지권(賭地權)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지권을 가지고 있던 소작인들을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주라할지라도 함부로 쫓아낼 수 없었으며, 이는 농촌 경제를 건강하게 유지되도록하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러한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작권을 가지고 있던 소작인들은 지주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야만 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선조들은 큰 시련을 맞이한 것이다. 일제와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1910년 경술국이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며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엄혹한 시절 그렇다면 부천에서의 일본인 토지의 소유는 어땠을까. 부천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위치하고, 특히 1899년 경인철도 개설되고 소사역(素砂驛)이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정착했다. 침략자 일본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던 부천, 그 중 특히 소사역이 위치했던 심곡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912년 심곡리 <토지조사부>에 나와있는 일본인들을 거주지를 중심으로 명단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1912년 부평군 석천면 심곡리(1914년 부천군 계남면 심곡리로 개칭) 토지조사부?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1912년 심곡리의 소유주 명단을 정리하였다. 국가기록원에 나와있으며, 이를 거주지 중심으로 부천, 서울, 인천, 일본으로 분류하여 정리하면 표와 같다 ⓒ 국가기록원 위 표를 통해 이 당시 부천에 정착한 일본인들 중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16명, 인천에 거주한 일본인은 10명, 서울에 거주한 일본인은 14명, 일본에 주소를 둔 일본인도 3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심곡리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느 직능에서 활동했을까? 부천에 정착할 사람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오정면 삼정리의 수진미삼송(水津彌三松)이다. 수진미삼송은 1906년 부천에 들어와 1933년에 200여정보의 전답(田畓)을 소유한 농장주가 되었으며, 소작인은 15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 부천에는 여러 농장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수진(水津)농장이었다. 북천좌칠(北川佐七)과 곡천우팔(谷川友八)은 소사학교조합 관리자였다. 소사학교조합은 1913년 5월 설립허가가 났으며, 이를 통해 소사심상소학교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학교조합이 일본인들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교사(훈도) 뿐아니라 관리자도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송전정일(松田正一)은 1923년 11월에 계남면 면협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전중천태랑(田中千太郞)은 1935년 5월 소사면 면협의원에 당선되었다. 인천에 정착하며 심곡리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 중 독보적인 존재는 바로 전중좌칠랑(田中佐七郞)이다. 전중좌칠랑은 1861년 03월 17일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1883년 9월 16일 조선으로 건너왔다. 젊은 나이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선에 온 일본인으로 1883년 10월 인천부 해안정(仁川府 海岸町)에 정착하여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36년 2월 4일 뇌일혈로 사망하게 되는데 50여년을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중역을 오래 역임했으며, 인천 상계에서는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었다. 이 공로로 인해 1933년 표창을 받았는데, 개항할 때부터 중요하게 활동한 사람들이 30명이었는데 1933년 생존자는 9명에 불과했는데 그 사람 중 한 명이 전중좌칠랑이었다. ▲ 1933년 10월 9일 조선신문에서의 田中佐七郞(전중좌칠랑) 소개 기사?이 신문은 田中佐七郞(전중좌칠랑)을 인천부 해안정 1번지에 거주하며, 십수채에 불과한 어촌이었던 인천 개항부터 1933년까지 활동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미두인취소와 인천미두인취소 등에서 중역을 하였다 ⓒ 국립중앙도서관(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서울에 정착하며 심곡리에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 중 가장 거물은 산구병태위(山口太兵衛)이다. 산구병태위는 1865년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일찍이 조선무역( 朝鮮貿易)에 뜻을 두고 오사카에 있는 신원상.(新原商店)에 취직하여 실무를 습득하였다. 그리고 1884년 신원상。의 인천 출장으로 조선에 건너왔다. 서울에 무역상을 차려 독립하며 거상(巨商)으로 성장했다. 1921년 당시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 이사(理事), 실업은행(實業銀行) 이사, 경성일환수산주식회사(京城日丸水産株式會社) 사장,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 감사역으로 재직했다. 특히 장남인 산구장남(山口長男)은 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1943년 삼정리로 내려와 활동했다. 소림원육(小林源六)은 1867년생으로 미예현(三重縣) 출신으로 1904년 3월 한국으로 건너와 주식회사 정자옥상。(株式會社 丁子屋商店)을 창립했다. 이것은 백화.으로 상업계에서 거상이 되었디. 이외에도 큰 기업에 중역을 역임했다. 곡구소차랑(谷口小次郞)는 오사카 출신으로 1887년에 일본 철도국에서 근무를 했다. 철도국에서 선로를 측량하고 건설공사를 했으며, 1899년 3월 경인철도를 건설을 위해 대한제국으로 건너왔다. 경인철도가 완성된 후에는 경부철도 건설부를 옮겨 영등포 및 대전 건설사무소 소장에 임명되었다.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 기사(技師)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12월에 퇴직했다. 1910년 이후에는 서울에서 토목건설청부업을 시작했다. 이처럼 다수의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 그 중 부천으로 들어오며 많은 땅을 소유하였으며 거주지에 얽매이지 않으며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이것은 기존에 생활해왔던 우리 선조들은 단순히 식민지배를 넘어서 경제적 수탈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알 일제 자본과 일본인들은 땅에 떨어진 돈을 줍듯이 조선 전역에서 토지를 싸게 사들였다. 특히 일제는 1923년 부평에서 생산된 쌀을 본토로 보내기 위해 부평수리조합을 설치하였으며, 과도한 수세와 조합료로 농촌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쌀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일본으로 빼앗기고 만주에서 생산된 콩과 보리로 연명을 해야 했으며,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의 삶의 비애의 그 시작은 바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과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선총독부의 토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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