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늦가을 남경(南京 난징)은 더 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가족들이 머물 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7월 7일 노구교(盧溝橋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전면화한 뒤 일본군은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밀려왔습니다. 일본군의 공습이 계속됐고, 김구가 살던 남경 회청교(淮?橋) 부근의 집도 폭격을 받아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임정 가족들은 남경에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김구에게는 임정 대가족들을 이끌고 이동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주애보(朱愛寶 주아이빠오)를 고향으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남몰래 김구를 보호하던 그녀를 내놓고 임정 대가족들과 함께 이동하게 하는 문제는 쉽지 않았습니다. 김구는 그녀에게 고향 가흥(嘉興 자싱)으로 돌아가게 하고 돈 100원을 주었습니다.
김구는 훗날 『백범일지』에서 이 일을 생각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주애보가 자신을 5년 동안 보살폈고, 함께 지내는 사이에 두 사람에게 '부부와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떠날 때 돈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100원밖에 주지 못했을까요. 김구 자신이 이유를 남겼습니다. 다시 만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애보가 가흥으로 돌아간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5년 1월 중국 시나뉴스, 9월 저장온라인, 10월 CCTV의 현지 취재 등 중국 언론들이 가흥에서의 김구를 취재하기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취재 후 매체들의 결론은 "가흥으로 돌아온 주애보의 후반생은 수수께끼가 되었고, 고증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애보. 김구의 차남 김신이 아버지 타계 후 부친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명함판 사진 2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김신은 이 사진을 근거로 중국에서 주애보를 여러 차례 찾아 나섰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1. 암살작전 속에서 살아남은 김구
김구에게는 수많은 중국인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훗날까지 주애보와의 작별을 아쉬워했던 것일까요? 지난 일을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가 대규모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날 이후 김구는 일본이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거 직후 한국인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김구는 신문투고를 통해 자신이 배후임을 밝혔습니다. 그의 글은 간담이 서늘하도록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거사의 주역인 한인애국단을 소개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한인애국단은 애국 동지들을 모아 조직하였으며, 그 목적은 무력으로 조국을 구하는 것이다. 오직 자원하여 아무 대가 없이 희생자가 되어야만 비로소 단원이 될 자격이 있다. 대원에게 어떤 임무를 맡겨 어디에 파견할지, 누구에게 대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할지는 모두 나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단원들은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단체는 회의를 열지 않으며, 우리의 업무 진행은 절대 비밀이다. 우리는 적의 중요 인물을 암살하고 적의 행정기관을 파괴하여, 조국의 독립을 이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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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쓴 자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김구이다. 금년 57세인 나는 이미 내 생명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기사를 읽은 중국인들은 모두 감탄했습니다.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은 "정규 군대 1개 군단의 전투 성과보다 뛰어나다"며 비행기를 보내줄 테니 만나자고 접선을 시도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추적이 시작됐습니다. 곧바로 김구의 도피 생활이 시작됩니다.
일제는 김구에게 60만 대양(大洋)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당시 중국인 하루의 임금은 1원이었습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1600년을 일해야 하는 금액입니다. 김구를 상해에서 빼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가흥의 실력자 저보성(?輔成 추푸청)이었습니다. 저보성은 중국동맹회 계열의 원로 정치인이었고 당시 상해 항일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남 저봉장(?鳳章)과 양자 진동생(陳桐生)도 김구 보호에 뛰어들었습니다.
김구가 가흥에서 처음 몸을 숨긴 대표적인 곳이 매만가(梅灣街 메이완가) 76호 진동생의 집이었습니다. 집은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2층에는 바깥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창이 있었고, 수상한 자가 접근하면 마룻바닥의 판자를 들어 올려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내려가면 호숫가에 탈출용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구의 가흥 은신처였던 매만가 76호 진동생의 집. 윤봉길 의거 뒤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으로 온 김구는 저보성의 도움으로 이곳에 숨어 지냈다. 건물 뒷쪽이 곧바로 남호의 물길과 이어져 있어 위급할 경우 2층 비상탈출구로 내려와 주애보가 모는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었다. 현재 이 건물은 '김구 피난처'라는 이름으로 중국 저장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얼마 후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1932년 여름 일본 경찰이 상해-항주 철도 주변을 중심으로 김구를 추적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봉장의 부인 주가예(朱佳?)가 나섰습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김구를 데리고 가흥을 빠져나가 자신의 친정이 있는 해염(海鹽)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100여 일을 숨어 지냈고, 그 이후 김구는 끝없이 장소를 바꾸며 숨어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김구는 의심을 받게 되자 다시 가흥으로 돌아왔고, 매만가 76호를 거쳐 교외 엄가빈(嚴家浜)의 조력자 손영보 집에도 몸을 숨겼습니다. 김구가 어느 날 혼자 외출했다가 군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독립군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던 김구는 훈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장교가 다가와 출신지를 물었습니다. 중국인으로 위장해 가명을 쓰고 있던 김구는 광둥 사람 '장진구'(張震球)라고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장교가 진짜 광둥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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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붙잡혔습니다. 진동생 등이 나서 신원을 보증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저봉장은 김구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인 가운데 서른 살가량 된 중학교 여교사가 있는데 남편을 잃은 사람이니, 만나보고 마음이 맞으면 함께 사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김구는 교육받은 여성과 살면 자신의 비밀이 금방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글을 모르는 뱃사공 처녀 주애보에게 의탁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애보와 김구가 처음에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남호에는 작은 배를 부리는 선랑(船娘)들이 있었습니다. 주애보도 그 중 한 사람으로, 김구가 배를 타고 동탑사(東塔寺)로 피신·왕래하는 과정에서 외로운 가슴에 들어온 여성일 듯합니다.
2. 처녀뱃사공에서 유사부부로
다음날부터 김구의 은신처가 집에서 물 위의 배로 옮겨갑니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 가에서 잡니다. 주애보는 '장진구 선생'을 모시고 낮에는 노를 젓고 밤에는 배를 정박시켰습니다. 중국의 한 자료에는 김구가 주애보 집에 매월 15원을 주기로 하고 두 사람이 부부로 가장했다고 전합니다. 당시 15원은 여성근로자 한 달의 수입에 해당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애보의 역할은 배 젓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장 선생'을 보호했고, 그의 비상 탈출 마지막 부분을 구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김구는 오래전에 아내를 잃은 57세의 중년이었고, 주애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윤봉길 의거 후 상해를 탈출해 피신처 가흥에 모인 임정식구들.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아들 후동이를 안고 있는 정정화, 민필호의 어머니, 아들 기동이와 기선이를 안고 있는 연미당(엄항섭 부인). 저봉창의 처. 뒷줄 왼쪽 세번째부터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저봉창(저보성의 맏아들), 나머지는 저씨 집안의 중국인들
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는 『백범일지』에는 간략히 기록이 있습니다. 남경에서의 생활을 포함해 거의 5년 동안 주애보가 자신을 보살폈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부부와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김구는 자신들의 관계를 '유사부부'로 표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애보가 김구의 실제 신분을 정말 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김구는 장개석의 도움으로 남경으로 나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등을 운영하며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경의 일본 총영사였던 수마 야키치로가 남경의 치안과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곡정륜(谷正倫 구정룬) 사령관과 김구의 체포를 위해 교섭을 벌였습니다.
일본 측의 요구는 "김구를 일본이 체포하려 하니, 중국이 체포에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정부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김구를 잡을 수 없으니, 가짜 김구를 만들어 체포하더라도 끼어들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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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정륜은 "그렇다면 현상금은 내가 받아야 한다"는 말로 일본 측의 요구를 따돌렸습니다. 그리고 곡정륜은 그 면담 내용을 김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일본의 김구 살해작전은 매우 치밀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김구를 잡기 위해 도쿄제국대학 출신 사법·행정고등고시 양과를 합격한 히토스키 도헤이 등 엘리트 수사관들을 거듭 파견했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김구는 가흥에 있는 주애보를 남경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회청교 부근에 집을 얻은 뒤 고물상을 차려놓고 동거했습니다. 상해와 남경 전역에 쫙 깔린 밀정들이 밤낮없이 추적망을 좁혀왔지만, 김구는 번번이 한발 앞서 움직였습니다. 주애보는 김구의 생존전략 안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무렵 김구를 둘러싼 움직임은 '광동사람 골동품상'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중국 국민당 고위인사들이 그의 신변 보호에 관여했고, 김구와 가까운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김구와 한집에서 살면서 경찰의 호구조사까지 따돌렸던 주애보가 정말 끝까지 그를 '광동 사람 장진구'로만 알고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애보는 어떤 기록에서도 김구를 '광동출신 골동품상 장진구'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깊은 속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전쟁 중 이별, 김구는 그녀를 보내지 않았다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전면화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일본군이 남경으로 진입했고 공습이 계속됐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와 가족들은 중국 내륙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애보는 그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김구가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는지는 현재 확보된 기록만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집단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김구와 유사부부로 살던 중국 여성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애보의 또다른 사진.(서 있는 모습)
김구는 주애보에게 고향 가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00원을 주었습니다. 결별금이 아니었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 100원을 줬는데, 두고두고 아쉽다고 썼습니다. 그들은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의열단 최고의 이론가로 꼽혔던 아나키스트 유자명은 중국의 『김구평전』(金雲龍, 랴오닝민족출판사, 1999)에서 이렇게 회고합습니다. "백범 선생은 주애보와 함께 살면서 정신적으로 어느 때보다 안정되고 편안해 보였다. 백범 선생은 중경에서 자주 주애보를 입에 올리며 그리워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이별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구는 주애보를 떠나보냈지만, 마음속으로 이별하지는 않았다."
1945년 김구는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애보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1949년 김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 김신이 주애보를 찾으려고 나섰습니다. 김신은 1922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성장했고 중국 공군군관학교를 거쳐 항일전쟁에도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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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공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1989년부터 김신은 중국에서 아버지의 발자취와 아버지를 도운 중국인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4. 아들이 그녀를 찾아 나섰다
1989년 7월 가흥을 방문했을 때 김신은 아버지가 숨어 지냈던 매만가 76호를 찾아냈습니다. 한중수교 이전이었습니다. 그때 김신은 중국 송경령기금회 등의 민간 경로를 통해 중국에 입국했고, 촬영팀도 동행했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항일운동 현장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김신은 가흥뿐 아니라 상해 남경 중경 등 아버지가 활동했던 중국의 여러 도시를 찾아다녔습니다. 그 후에도 김신은 가흥에 올 때마다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습니다. 중국 작가 샤녠성(夏?生)은 일흔에 가까운 김신이 『백범일지』를 갖고 아버지가 갚지 못한 은혜를 갚기 위해 여러 차례 가흥을 찾아왔다고 자신의 소설 『선월』(船月)의 보충설명에 기록했습니다. 김신은 저보성의 후손도 찾았습니다. 자신을 숨겨서 보호해준 저보성의 묘를 새로 조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용을 보탰고, 1995년 12월 22일 안장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가 몸을 숨겼던 해염 남북호의 재청별서를 찾았습니다. 64년 전 아버지가 일본의 추적을 피해 숨어 있던 집을 찾은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水思源 韓中友誼'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한다. 한중의 우의를 기억한다.
1996년 9월 30일에는 가흥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저보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주 상해 대한민국 총영사 경창헌이 김영삼 대통령이 서명한 훈장증을 낭독하고, 저보성의 장손이자 전 주짐바브웨 중국대사 저계원(??元)에게 훈장과 훈장증을 전달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신은 사진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진첩에서 찾아낸 주애보의 명함판 사진 두 장입니다. 김신은 그 사진을 저보성의 손녀 저리정(?離貞 추리전)에게 건네주며 사진 속 주인공의 행방을 알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리정은 사진을 들고 주인공을 찾아다녔습니다. 김구를 숨겨준 중국인의 손녀가 김구의 아들이 건넨 사진을 들고, 위험 속의 김구를 보호해준 중국 여자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5. 명월다관의 주계보는 누구인가
저리정은 가흥의 하미붕(下米棚)에서 동책(東柵)까지 사진 속 주인공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남경에서 가흥으로 돌아온 뒤 주애보는 더 이상 뱃사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문하부(南門河埠)에 명월다관(明月茶館)이라는 찻집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뒤 위진성(郁金生)이라는 요리사와 결혼해 동책으로 옮겨 살았고 이름을 '주계보'(朱桂寶)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었습니다. 주계보가 주민위원회 관계자에게 "내 원래 이름이 애보였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나왔다는 것입니다.
저리정은 주계보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의 여동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동생에게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얻었습니다. 김신이 아버지의 사진첩에서 찾아 건넨 사진과 비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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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인민망 보도는 얼굴과 옷차림의 일치도가 높았으며, 현지 조사자들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주계보가 주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주애보의 후반기 삶이 상당 부분 복원됩니다. 주애보는 남경에서 가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찻집을 열고 다른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언제 세상을 뜬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2017년 『저장공인일보』의 기사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여인」(角落里的女人)은 이 사실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 기사는 명월다관→위진성과 결혼→동책 이주→주계보 개명이라는 이야기를 소개한 뒤, 이 이야기를 추적한 결과 '근거 없이 꾸며낸 것'(杜撰)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애보의 후반부 삶은 세 단계로 바뀝니다. 2005년에는 고증할 길이 없는 수수께끼였고, 2015년에는 주계보라는 인물을 통해 상당 부분 찾은 듯했다가, 2017년에는 주계보 설 자체가 다시 부정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애보의 삶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명월다관이 실제 존재했는가 ▲위진성이라는 인물이 동책에 살았는가 ▲주계보의 주민기록이 남아 있는가 ▲저리전이 주계보의 여동생에게서 얻었다는 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확실한 자료가 발견된다면 주애보의 1937년 이후 삶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입니다.
임순만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의 표지.
6. 독립운동사는 주애보에게 진 빚이 있다
주애보를 찾아가다 보면 이상한 불균형을 만나게 됩니다. 김구가 1932년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는 찾을 수 있습니다. 매만가 76호도 남아 있고 재청별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김구가 어느 방에 숨어 있었고, 위급할 때 어느 물길로 빠져나갔는지도 상당 부분 복원할 수 있습니다.
진동생의 아들 진국침(陳國琛)은 「지난 일의 회고―존경해 마지않는 김구 선생」에서 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조소앙이 주애보의 배를 타고 와 김구를 태웠고,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외항 쪽으로 가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애보는 김구를 폭탄상자 배달자인 손계영(孫桂榮 쑨구이롱)의 집에 내려주고, 조소앙을 다시 가흥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조소앙은 이삼일에 한 번씩 손계영의 집을 찾았고, 김구는 손의 집에서 가끔 머물렀다고 썼습니다. 주애보의 배는 은신처이면서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을 이어주는 비밀 연락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애보의 생몰 연도조차 알지 못합니다. 역사는 위인의 이름은 크게 남기면서 그를 살린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애보도 그런 사람입니다. 주애보가 지킨 것은 김구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었습니다. 김구가 살아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도 함께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작별 이후의 그녀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과묵한 김구가 『백범일지』에 남긴 짧은 말이 있습니다. "주애보의 공로가 적지 않다."
주애보. 우리 독립운동사가 아직 빚을 갚지 못한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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