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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가 이렇게 좋은 애라고?"
지난 여름방학식 날, 1학기 '학교생활통지표'를 받아든 초등 2학년 학생의 혼잣말이다. 각자 자기 통지표를 읽어보느라 그 학생의 말은 허공에 흩어졌겠으나, 내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방학이 된 지금까지도 그 말은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그때 나는 짐짓 못 들은 척하고, 전체 학생에게 일러주었다.
"여러분, 통지표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여러분이 학교 생활 하며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각자가 가진 장.만을 찾아 쓴 글입니다. 자신의 좋은 。을 잊지 말고 지켜가길 바라요. 그동안 선생님이 지적하고 꾸중했던 건, 다 잘하는데 '이것만은 고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혹시 아이들이 오해할까 싶어 덧붙인 말이다. 35년 교직 생활 동안에 통지표를 보고 자신의 실제 모습과 교사의 평가를 대조하며 의아해하는 학생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
혼잣말의 주인공은 우리 반 '나대로(가명)'라는 남학생이다. 대로도 여느 아이들처럼 。심 급식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우리 학교는 교실 급식을 하는데, 내가 급식차를 끌고 오면 대로는 늘 먼저 달려와 문을 열어 주고 급식차를 함께 밀어준다. 친구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모자랄 것 같으면 "뒤에 있는 친구는 못 먹을 수도 있어. 조금씩만 받자"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한다. 내가 하려던 말을 대신해 주니 매번 고마울 따름이다. 음식이 부족해지면 빈 통을 들고 선뜻 급식실로 달려가는 사람도 대로다.
▲ 협동작품 만들기?초등2학년 학생들이 모둠으로 둘러 앉아 '우리들이 살고 싶은 행복한 마을 꾸미기' 활동을 하고 있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즐겁게 공부한다. 자기들이 살고 싶은 행복한 마을은 놀이터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 AI
학업 태도에서도 칭찬할 。이 많다. 수학 단원평가를 봐도 다른 친구와 。수를 비교해서 우쭐대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수학 시간에 내용을 어려워하는 친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일도 자주 있다. 학용품을 나누어 쓰는 일도 많았다. 수학 시간에 자를 가지고 오지 않은 친구에게 자기의 자를 빌려주면서 먼저 쓰라고 양보하는 일도 있었다. 급식 시간에 교실 바닥에 반찬을 흘려 난감해하는 친구가 있으면, 자기 사물함에서 물티슈와 화장지를 꺼내다가 닦아주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예쁜 면 뒤에는 실수들도 있었다. 친구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어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반성문)을 쓰게 하고 부모님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어머니 서명을 흉내 내 '위조'해 온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을 속이는 것은 매우 나쁜 행동이라 엄하게 꾸짖었더니 한동안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도 했다.
하루는 받아쓰기 시험 중, 책상 속에 급수표를 넣어두고 힐끗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슬며시 어깨를 짚어주니 금세 눈치채고 급수표를 가방에 넣었다. 방과 후 조용히 불러 물었다.
"대로야, 몰래 급수표를 볼 때 마음이 어땠어?"
"...떨렸어요."
"그래, 마음이 참 불편했지? 받아쓰기 한 두 문제 틀리는 것보다 양심을 지키는 게 훨씬 값진 거야. 선생님은 대로가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했으면 좋겠어."
"죄송합니다."
학기 말, 나는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에 대로의 장.을 담아 적었다. 학급을 위해 봉사하는 태도,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 협동 활동에서의 책임감 등을 강조했다.
"타인을 배려하고 학급에 봉사하는 마음이 남달라 학급의 소중한 일꾼 역할을 수행함. 급식 준비를 적극적으로 돕고 주변 친구들의 상황을 살펴 학용품을 나누거나 곤경을 해결해 주는 등 공감 능력이 뛰어남. 평가 결과에 흔들리지 않고 성실하게 임하며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줌. 신체 활동이 왕성하고 체육 활동 시 적극적인 열정을 보이며, 모둠 협동 작품을 만들 때에도 친구들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완성도 높은 결과를 이끌어냄."
초등2학년 아이가 이 문장들을 온전히 이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좋은 면이 많은 사람'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장을 써 내려가며 끝까지 고민하다 지운 문장이 있다.
"때로 잘하고 싶은 의욕이 앞서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하나, 지도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올바른 가치관과 정직한 습관을 형성해 가고 있음."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미 잘못을 깨닫고 사과까지 한 아이에게 주홍글씨처럼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이 과연 교육적으로 옳을까. 들춰내지 않기로 했다.
매년 통지표를 작성할 때마다 나의 고민은 깊어진다. 학생의 개선 .을 적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럴 때마다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몇 해 전, 한 학생이 여러 차례 학습 준비물을 갖추지 않아 신경이 쓰였다. 지우개도 없고, 연필심은 다 부러져 있고, 12색 색연필 중 서너 자루는 없어지고. 종이를 자를 일이 있으면 또 가위 찾느라 한참 걸리고, 학생도 나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알림장에 준비물 갖추기를 쓰게 하고 학부모에게 전화 상담을 해도 개선이 되지 않았다.
그 아이의 통지표에 "학용품을 잘 갖춘다면 학습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짐." 등으로 적었다.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 학년이 다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 ADHD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학부모로부터 들었다. 더 세심히 살펴보지 못한 게 미안했다.
또 한 학생의 경우, 등교 시간이 늦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학교 등교 시간은 8시 40분까지이고 9시에 1교시가 시작된다. 그런데, 꼭 5분 전 또는 9시 시종을 알리는 방송 알림음과 함께 교실문을 여는 학생이 있었다. 지각생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해도 수군대는 아이들을 막기는 어려웠다. 지각생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걱정되었다.
학부모에게 수차례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고, 하이톡문자를 해도 한참 후에야 읽고, 그래서 학부모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학교생활통지표에 "아침 등교 시간을 잘 지키면 학교 생활이 더욱 즐거워질 것으로 여겨짐" 등으로 적었다. 그러나 2학기에도 지각은 이어졌다. 뒤늦게 밝혀진 속사정은, 어머니가 야간 근무를 하는 날이 많고 아버지는 새벽 출근을 하는 가정환경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거치며 깨달았다. 요즘은 학생 개인의 가정환경 속사정을 교사가 알기 어려운데, 단 몇 개월의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한 아이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변화무쌍한 어린 학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에 학생의 장。을 먼저 찾아 살려주고 싶다. 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정하게 바로잡아 주되, 학생의 자존감까지 무너뜨리는 말과 글은 경계하리라 다짐해 본다. 통지표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던 대로가, 자신이 '참 좋은 아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해 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대로에게 뒤늦은 답변을 해야겠다.
"맞아, 넌 참 좋은 아이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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