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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文章)』-목일회와 구인회의 만남
구본웅이 『청색지』를 발간하던 무렵 구인회의 이태준, 정지용 등과 목일회의 김용준, 길진섭 등이 주축이 되어 1939년 2월 창간한 『문장』은 1941년 4월 폐간될 때까지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 광기가 이 땅을 덮칠 때 우리말과 정신을 지키려는 민족적 자존심의 표상으로 평가되는 잡지다.
문학적 의미도 뛰어나지만, 이와는 별개로 당시 미술계도 파악할 수 있는 문예지였다. 김용준은 총 27권 중 15회의 장정과 많은 원고를 실었고, 동양주의 미술을 주장했던 상허 이태준이 편집을 하고, 목일회전에 모두 참여했던 길진섭이 디자인을 총괄하면서 8회의 장정을 맡았으며, 목일회전에 출품했던 김환기도 권두화, 삽화 등을 그렸다. 여기에 배운성, 정현웅, 김기창, 이승만 등 당대의 중견 화가들이 참여하여 『문장』은 명실상부하게 문학과 미술의 시너지가 모인 결정체였다.
[좌] 『문장』 창간호(1939.2) 표제화의 수선화와 제호는 김정희의 그림과 추사체를 사용했다. /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우] 『문장』 증간호 (1939.7) / 사진. ⓒ현담문고
이들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문장』의 첫 특집호인 7집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소설가들의 소설 특집으로, 중견화가 11인이 참여하여 <십일 화백 하제선(夏題選)>이란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다. 길진섭, 이병규, 윤희순, 김환기, 정현웅, 김용준, 김규택, 김만형, 구본웅, 이승만, 이상범이 그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목일회의 회원이거나 김용준, 길진섭과 맥을 같이 하는 이들이었다.
편집 후기에 길진섭은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화백들이 그려준 작품은 금상첨화였으며, 제작의 불충분으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게재하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데, 11인 외에 더 많은 작가가 참여한 것으로 보아 첫 증간호 7집은 『문장』에는 미술계의 경향성이 온전하게 스며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문장』 통권 7호(소설 특집 증간호)에 수록된 작품 <십일 화백 하제선(夏題選)> 도판. 중견 작가 11인이 그린 삽화 모음 / 제공. 필자
『문장』 증간호 (1939.2), 재구성, 좌에서 우로 게재된 작가와 작품 /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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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작품에 대한 혹평-김환기
구본웅이 서양화로 작품을 마지막으로 출품한 것은 마지막 《목일회전》이었던 1939년 7월에 화신갤러리에서 개최된 《양화동인전》이었다. 그때까지는 구본웅의 작품은 출품 때마다 대부분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중견 작가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 전시회에 처음 작품을 출품했던 김환기가 그해 말 동아일보에 기고한 「을유년 화단 회고」에서 전시회 출품작에 대하여 과감한 혹평을 하였다. 그는 ‘대가라 할까 중견 작가라 할까 그것은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으나 그러한 화가들이 집단으로 양화동인전’을 열었는데 길진섭에게는 신뢰해야 할 책임적 작품을 보여주지 못해 지극히 불만이며, 의무적 작품을 제작하기 보다 자발적 작품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이병규의 작품에선 골목에서 하품하는 감이 들고, 이마동, 홍득순 역시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고 평했다. 특히 구본웅의 작품에 대하여는 신랄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구본웅씨로 말하면 여전한 씨의 독특한 화법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독특할지는 모르나 독특함으로서 예술 작품은 될 수 없다. 씨에게는 작품적 결과로 보아 극히 우연의 성과를 놓치는 막연한 작화 태도를 볼 수 있으니 진실한 작가로서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김환기, 「을유년 화단 회고」, 동아일보 1939.12.21.)
어느 정도 대가 내지 중견의 반열에 든 구본웅의 작품도 상대적으로 신인인 김환기의 눈에는 진부하게 보였던 것 같다. 더구나 본인도 참가했던 《양화동인전》은 덤덤했으나 《재동경미술협회전》은 지극히 활기가 넘쳐 우리 화단의 희망이라고 극찬하였는데,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에게는 목일회원들의 작품세계가 고루하여 못마땅한 듯하다. 아이러니하게 6년 후인 1944년 김환기는 이상의 미망인이자 구본웅의 의붓 이모인 변동림을 고희동의 주례와 정지용과 길진섭의 사회로 결혼식을 치루며 아내로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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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혹평 때문은 아니었겠으나 그 후 별다른 작품 활동 없이 1942년 4월 이제창, 이승만, 윤희순, 박상진 등과 화신화랑에서 《서양화가들의 수묵화전》을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 매일신보는 ‘금번 화단의 이채 있는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하면서 서양화가들의 수묵화가 30여 .을 전시되었다고 보도했다. 무엇보다 서양화가들이 수묵화 전시회를 열었다는 것도 특이했지만, 무엇보다 중진 화가들이 ‘전통 재창조’의 새로운 방법으로 전통 수묵화를 선택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전시였다. 구본웅이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조선적 유화’에 대한 다양한 시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구본웅의 작품과 열기는 1930년대 절정에 이르고 후반부터 시들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41년 3월 애지중지하던 창문사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는 큰 시련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데 차남 구순모의 증언이다.
“선산이 북한산 육모정 골짜기인데 인근 140만 평(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일대)을 소유하고 있었어요. 언젠가 묘지기 아저씨 말씀이 ‘(화재가 나고) 아버지가 육모정 바로 앞에 허름한 정자를 지어놓고 늑대가 우글거리는 산속에 혼자 계셨다’고 해요. 묘지기가 며칠마다 숯과 나무, 쌀 등을 지게로 날랐다고 합니다. 창문사에 불이 난 뒤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번민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아버지의 아호가 서산(西山)입니다. 육모정 옛 지명이 바로 서산이에요.”(월간조선 2018.5, 한국 입체파 그림의 대명사 구본웅)
화가로서 『시와 소설』을 발행하고 『청색지』를 창간하면서 문학과 그림의 미적 일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였기에 시름이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허튼 길-채필보국하는 미술인
1930년대 후반은 일제 전쟁의 광기가 스멀스멀 한반도를 덮기 시작할 때다. 그 무렵 발간된 대부분의 잡지에 자의든 타의든 ‘황국신민의 서’가 의무적으로 인쇄되어 발간되었다. 1938년에는 중등학교 교과목 중에서 한국어를 삭제하면서 교육은 물론 사용까지도 금지하였다. 급기야는 1940년에는 우리말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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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기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한다. 구본웅에게도 어쩌면 피할 수 없었던, 아니 외면할 수 없었던 일이 군국주의의 광기는 비껴가지 않았다. 1939년 6월 13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 「제18회 조선미전 양화참견기」에 처음으로 ‘내선일체’를 언급하면서 조선미전이 반도의 독특성은 물론 (일본)중앙화단의 연장에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원안) 건물, 4.19 때 불탔고, 지금은 프레스센터가 들어서 있다.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또한 첫 회에 언급한 것처럼, 1940년 1월과 7월 두 번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채필보국의 일념 」’과 「‘사변과 미술인」’이라는 글도 발표한다.
"미술인은 적극적으로 역할을 다하여, 사변 승리를 위하여,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미술의 무기화에 힘쓸 것이며 나아가 신동아 미술의 탄생을 꾀할 것", "미술인들이여!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에 보할 것..." (매일신보 1940.1.3.)
이렇게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친일의 구체적인 흔적을 남겨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의 걸어온 길에서 가장 큰 허튼 일이었을 것이다.
[좌] 매일신보(1940.1.3.) 채필보국의 일념 [우] 매일신보(1940.7.9.), 사변과 미술인 /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해방-참회록
누군가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했다. 그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가까스로 그의 심경을 알 수 있는 글을 남겨 두었다.
“내 나이 41세, 생활의 대부분과 미술 생활의 전부가 왜정의 그물 속에서 지냈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倭)적 감념이 없다고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나는 백이숙제와 같이 고사리조차 캐먹지 못한 생활을 했다.”(구본웅,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 중 )
첫 회에 언급하였듯이 ‘백이숙제’가 되지 못한 회한의 고백이다.
“내 말하노니 미술가여, 모름지기 이 과거의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라. 그리고 다시 나오라. 자연에 환원한 캔버스에 새 붓을 들라. 눈을 감았다 떠라. 깨끗함을 볼지니 조선의 빛을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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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태극기나 자꾸 그리고,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의 포스터나 그리자는 것은 아님을 알라. 미술가 자신의 프레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구본웅,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 중 )
그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고 원효로 신창동에 ‘조선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여 근대화단의 흐름을 나름대로 정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1946년에는 미군청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면서 양정학교 미술교사 김경원과 함께 『중등학교 미술교본 1, 2, 3』을 편찬했다. 구본웅에게는 그림 그리는 것 외에 가장 적합한 일인 듯하다. 그의 치밀함이 곳곳에 묻어있다.
내용을 보면 기하 형체, 색과 빛, 명암과 음영, 입체적인 것 등의 차례를 두어 기초적인 형체 표현을 설명하고, 원과 원주를 설명하면서 놓인 곳과 보는 자리에 따라 꼴이 달라진다는 이론을 펴고 적당한 것으로 사생하여 살필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꽃의 상징인 무궁화꽃을 실었다. 그리고 서양화가로 반 고흐와 모네를 소개하고, 함께 후기 인상파에 속하는 화가로 남쪽 사람인 세잔은 이지적인데 반해 북쪽 사람인 고흐는 열정적이라고 지역과 화풍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좌] 『중등학교 미술교본 2』 [우] 『중등학교 미술교본 2』 내지 모네 설명(좌)과 고흐 그림(우) /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우리의 그릇을 소개하며 ‘이조 항아리와 고려자기 사진’을 싣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 부분이다.
우리의 문화가 아세아 대륙의 한 줄기이며 중원에 영향을 많이 받고 또 중원의 것을 바라면서도 우리는 우리 대로의 한 테를 가지고 자라난 것이다. 미술의 미술다움을 찾느니보다 혹시 말하자면 살이(生活)를 위한 미술에서 그 한계를 그쳐서 겨레의 온 백성이 함께 가질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미술로의 길을 걸은 것이 우리의 살이미술(生活美術)이었던 것으로 어찌 보면 미술로의 세련을 다하지 않았다고 알지 못하는 외국 사람 중에는 혹시 말할 자가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미술은 그 넉넉함과 담담함이 세련이라는 것을 초월해서 있는 것이니.( 『중등학교 미술교본』 2 중)
백자와 청자의 예를 들어 세련됨을 뛰어넘는 넉넉함과 담담함이라는 우리 민족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고유한 생활미술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그의 미학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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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서산(西山)에 잠들다.
구본웅에게 한국전쟁은 그나마 자신감을 회복하던 시기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큰 시련이었다. 전쟁이 나자 먼저 큰아들 구환모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간 그는 판자집에 살면서 춘화를 그리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커피만큼은 늘 챙겨 마시는 커피향 나는 사람이었다.
한국전쟁 전후에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거의 없으나 <산>(1952)은 평생 그가 추구했던 ‘조선적 유화’에 대한 화두를 어느 정도 풀어낸 것으로 보이다. 야수파적 표현주의의 거친 윤곽선은 일필의 선묘로 대체되고, 대상의 형태를 평면적으로 구사하며, 원색의 도발적 사용을 자제하고 수묵채색화의 유려한 색감을 구현했다.
구본웅이 ‘야수파를 통해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했던 작품들, 조선적인 미감을 추구하며 전통주의를 나타낸 작품들, 나아가 동양화의 재료와 필법으로 완성한 작품들’은 순수하게 그를 서양화가로만 가두기에는 그 울타리가 너무 좁다.
구본웅,「산」, 캔버스에 유채, 40.0 x 71.0cm, 1952년, 개인소장
가족들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인현동에서 자취하면서 1949년부터 서울신문사 문화부 촉탁으로 근무하던 회사에 출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폐렴이 도져 아들이 살던 누하동으로 옮겨 아버지 구자혁과 차남 구상모가 지켜보는 가운데 1953년 2월 ‘제비’처럼 훨훨 날아갔다.
한편 화양연화 시절 다옥정의 세 사람은 생을 마감한 때도 장소도 다르지만 다옥정 72번지 박태원은 지금 영화계의 거목이 된 외손자 봉준호에게, 다옥정 33번지 이상은 아내 변동림이 훗날 김환기의 피앙새가 되어 사위로 맞이한 ‘엠버블루’의 화가 윤형근을 통해 그리고 다옥정의 좌장 구본웅은 외손자 발레리나 강수진에게 그들의 예술혼을 조금이라도 이어갈 수 있게 하였으니 결코 가족사에서도 허튼 삶은 아니었다.
서산(西山) 구본웅, 필운동, 동경, 다옥정, 수원, 기흥, 마산, 부산, 서울 수창동, 인현동 그 길 위에 쉼표를 그려 놓고 서울 누하동에서 잠들어 고양 서산(西山)에 길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유작 『허둔기』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허튼 수작 웃으시고 허튼 마음으로 보옵소서.”
심원보 미술사연구사
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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