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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9-08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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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노래에도 스며든다. 사람들은 전쟁과 가난을 견디며 노래했고, 격변하는 시대에 흔들리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가 태어나고 불리고, 때로는 전혀 다른 운명을 맞는 동안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라가 본다. 노래를 부른 사람들, 노래가 불린 시대를 들여다보며 한국 현대사를 풀어내고자 한다. <기자말> ▲ ?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의 사하라 사막에서 하카춤을 선보이는 마오리족 부대. 독일군에게 뉴질랜드군 마오리족 부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 위키미디어 공용 이른바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백인들을 마주한 신대륙과 그 외 지역의 원주민들은 대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질병도 무서웠지만 백인들의 우월한 무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다. 마오리족은 그야말로 '전투 종족'이었다. 마을 자체를 요새처럼 만들었고 자기들 부족 간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뉴질랜드 식민지화 과정에서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끈질긴 저항으로 곤욕을 치렀다. 마오리족의 용맹성은 뉴질랜드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1·2차 세계대전에서도 빛났다. 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전선 등에서 활약한 마오리 제28대대는 독일군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뉴질랜드군에도 마오리족 병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노래 이야기에 웬 마오리족 사설이 이리 기냐 하실 분도 계시겠다.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거의 국민가요처럼 불려 온 노래 하나가 바로 마오리족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연가>. 원래 제목은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이 노래를 둘러싼 전설의 무대는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 호수다 호수 가운데 섬마을에 사는 추장의 딸과 호수 건너편 청년이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두 부족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청년은 밤마다 호수를 헤엄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갔다. 전설답게 이야기는 여러 갈래다. 목숨을 걸고 물을 건너오는 남자를 기다리며 여자가 부른 노래라고도 하고, 남자가 목숨을 잃은 뒤 여자가 부른 노래라고도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적대하던 부족을 화해시켰다는 행복한 결말도 있다 알라딘다운로드 . 한국 젊은이들에게 특별했던 이유 분명한 것은 이 노래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노래인데도 한국에서 유별나게 사랑받았다는 사실이다. 6·25 참전 뉴질랜드군이 전파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고, 뉴질랜드 정부도 이를 인정한다. 뉴질랜드 국가 교육평가기관의 한국어 시험에 '포카레카레 아나가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에 전해져 <연가>라는 이름으로 1970~80년대 큰 사랑을 받았다'는 내용까지 등장한다. 머나먼 남태평양의 마오리 노래가 전쟁을 따라 한반도에 건너와 한국어 가사를 얻고, 급기야 한국인들의 애창곡이 됐다. 원곡의 나라 뉴질랜드가 오히려 '우리 노래가 한국에서 이렇게 사랑받았다'고 자국 학생들에게 가르칠 만큼 특별한 문화적 여정이었던 셈이다. 1970년대 통기타 세대 이후 <연가>는 해변에서, 강변에서, 산장에서, 계곡에서 젊은이들이 모이면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비바 비바 비바!" 누군가 선창하면 곧이어 노래가 터졌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이 노래의 추억이 한 자락도 없는 분이 계시다면 삼가 위로를 전한다. 당신의 쓸쓸한 청춘을 위하여 건배. ▲ ?1972년 8월 7일 유니버셜레코드에서 발매된 바블껌 베스트 음반 ⓒ 유니버셜레코드 이 노래를 한국의 청춘들에게 전달한 주인공은 1970년대를 풍미한 혼성 듀엣 '바블껌'이었다. 멤버는 이규대와 조연구. 두 사람은 고등학생 시절 YMCA 연합합창단 Y코러스에서 만났다. 이규대는 숭실대학교에 진학했지만 조연구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사정을 알게 된 이규대는 자기 등록금 전액을 조연구에게 건넸다. 방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은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을 그만뒀고 두 사람은 봉천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프니까 청춘이었고 그만큼 대담하니까 청춘이었을까. 이들은 바블껌을 결성해 당시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던 외국 노래를 번안하거나 직접 노래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연가>였다. 두 사람의 노래에는 유난히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두근거림이 많았다. 오리지널황금성 <짝사랑>에서는 "그녀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청춘을 노래했고, 훗날 김세환이 불러 유명해진 <토요일 밤에>의 원곡은 이규대의 <목요일 밤에>였다. 좋아하는 여학생을 만날 수 있는 합창단 연습일이 목요일이라서 나온 노래였다. <연가>의 한국어 가사를 만든 사람은 이명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노래를 당시의 청춘과 그다음 청춘에게 전달한 사람은 분명히 이규대와 조연구, 바블껌 커플이었다. 두 사람은 1974년 결혼했다. 비바람 몰아치던 고달픈 청춘의 파도를 함께 건넌 셈이다. 훗날 판소리 소리꾼으로 이름을 떨친 이자람이 이들의 딸이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 노래가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공식적으로 제도적으로 청춘 남녀들 갈라놓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바로 군대였다. 요즘 육군 복무 기간은 1년 6개월이지만 1968년 1·21 사태 이후 무려 8년 동안 육군 복무 기간은 36개월이었고 1977년에야 33개월로 3개월 줄어들었다. 노래 <연가>가 태어나고 한창 불리던 바로 그 시절이다. 이별가인 동시에 다짐의 노래 초등학교 저학년 때니 1977년 어간의 어느 날이었다. 서울 외갓집에 갔다가 부산으로 내려온 나는 부산역 앞 광장의 진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천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울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물으니 군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탈 기차가 곧 떠난다고 했다. 입영 장정들과 친구, 가족들이 부산역을 가득 메우고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입영 장정의 어머니를 무등 태워 오자 술에 억병으로 취한 장정이 큰절을 했다. 머리를 바짝 깎은 청년들은 눈물 흘리며 친구들과 포옹했고 "아무개 파이팅!" 하는 소리가 밤하늘을 찢었다. 있는 술을 다 마시고 기차에 타라는 듯 대접에 온갖 술을 섞어 붓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무리에서 노래가 들렸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어린 내 귀에도 익은 노래였다. 무심히 지나가는데 갑자기 곡조가 달라졌다. 여자의 독창이었다. 아주 천천히, 라르고로. "그대만을~~~~ 기다아아아리리…." 명창이었다. 이런 흐트러진 풍경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 발길을 재촉하던 어머니마저 멈춰 돌아보실 만큼 고운 목소리였다. 거기에 남자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심해게임 "내 사랑 영원히~~~~." 머리를 바짝 깎고 얼굴이 붉어진 입영 장정이었다. 둘의 음은 달랐다. 그러나 두 목소리는 화음을 이루었다. 뉴질랜드 어느 호숫가에서 서로를 기다렸을 연인들처럼, 등록금을 여자 친구에게 내주고 학교를 그만둔 남자와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한 여자의 듀엣처럼. 서로 다른 곡조가 완벽한 하나가 되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나도, 어머니도 그랬다. 여자는 목이 메어 갔고 남자의 눈시울도 이미 붉어져 있었다. 그래도 둘은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이이이…." ⓒ 김형민 노래가 끝났을 때 우리도, 옆에서 술 마시던 청년들도 일제히 박수를 쳤다. 노래를 부른 남녀는 눈물을 닦았다. "안아 줘라! 안아 줘라!" 사람들이 외쳤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어떻게 되나 더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 덜미를 잡혀 돌아서야 했다. 둘은 어떤 사이였을까. 그 뒤 다시 만났을까. 그리고 그 노래를 다시 함께 부를 수 있었을까. 내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국가와 제도가 청춘들의 이별을 강제했던 대한민국에서 이 노래가 수없이 불렸다는 사실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군대로 떠나는 남자와 남겨진 여자만이 아니었다. 사랑하는데도 헤어져야 하는 일이 흔했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한번 떠나면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시대였다. 몇 달 뒤, 몇 년 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무거웠다. '기다리리'라는 노랫말 역시 그들에게는 단순한 사랑의 수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감옥으로 끌려갔고, 누군가는 해외 광부가 되어 떠났으며, 누군가는 열사의 사막으로 돈을 벌러 갔다. 또 누군가는 고향을 떠나 도시 공장의 시다가 됐다. 그 숱한 이별의 순간에 뉴질랜드에서 건너와 어느덧 한국의 노래가 된 <연가>는 수시로,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 노래는 이별가인 동시에 다짐의 노래였다. 기다리겠다는 것. 그리고 기필코 다시 돌아와 건장하고 멋진 모습으로, 어여쁘고 아름다운 얼굴로 서로 마주하겠다는 것. 어느 마오리 남녀가 증오와 적대로 갈라진 부족을 넘어 사랑을 꽃피우고, 헤어진 슬픔을 견디며 서로를 기다렸던 것처럼 이 노래는 이별을 견디는 법을 가르쳤다. <연가>는 사랑의 노래이자, 이별을 강요받은 시대를 살아낸 청춘들의 약속이었다. /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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