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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6-09-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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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다제를 지켜보고 있는 영월엄씨 문중 유림들. 원강서원은 매년 봄가을 두 번에 걸쳐 춘향제와 추향제를 올린다. 이 향제는 두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차 사라져가는 효의 모습을 문중 후손이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향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홀기에 따라 거행되어 향제 자체가 우리 옛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충효도시로 불리는 울산에는 재실이 많다. 울주군만 해도 각 읍면에 평균 20여 개가 넘는 재실이 있어 모두 200여 개나 된다. 이들 중 울산시 차원에서 춘추향제를 올리는 치산서원을 제외하고는 원강서원처럼 문중 후손이 많이 모여 향사를 지내는 재실이 많지 않다. 해방 후 우리나라가 산업화되면서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우리가 숭상했던 유교문화에도 변화가 왔다. 울주군만 해도 훼손된 재실이 많고 재실이 있지만 후손의 무관심으로 향사가 사라진 재실도 적지 않다. 조상을 모시는 예절도 많이 변했다. 특히 울산은 공업도시로 젊은 층이 많아지면서 옛날에 비해 조상숭배 정신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요즘 젊은이 중에는 시조는 물론이고 입향조가 누구인지 또 자신이 문중 어느 파에 속하는지, 몇 대손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원강서원은 정조 23년(1799) 온산면 대정리 원강마을에 건립된 이래 후손이 매년 향사를 올려왔다. 이 향사는 고종이 위패를 내린 후 오랫동안 영남 유림이 중심이 되어 향사를 올렸기 때문에 향사 자체가 우리나라 전통 유교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고종은 원강서원에 사액을 내리면서 '불천위' 은전과 함께 재문과 제사 때 사용할 물목 그리고 재물이 든 단자까지 보내었다. 신천지릴게임소스 사액을 내릴 때 임금은 직접 축문을 써 보내거나 벼슬을 준다. 충의공은 증직 참판이 된 후 나중에는 판서가 되었다. 제사에 필요한 제수도 조정에서 직접 내리고 때로는 제사에 드는 비용도 보내어 주었다. ▲ 원강서원에서 헌다하고 있는 울산 차인들. ▲ 원강서원이 현 위치로 이건할 때 고 심완구 울산시장이 심었던 향나무. 사액이 내린 문중은 향사의 위상도 달라져 서울 인근에 있는 문중 향사에는 임금이 직접 참석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경우 너무 먼 길이다 보니 임금을 대신해 감사가 초헌관이 되기도 했다. 울산의 경우 감사가 있는 곳이 멀어 대신 울산 현감이 초헌관을 대신했다. 원강서원은 향사의 위상에서 보면 사액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높고 자랑스러운 인물을 모시는 서원이다. 원강서원에는 위패를 비롯한 고종이 하사한 단자와 재물 등 자랑할 것이 많다. 이 중에서도 가장 자랑하는 유물이 현재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강서원 비다. 이 비는 현재 원강서원 앞 비각에 세워져 있는데 비가 강화도 오석으로 제작되어 온산읍 대정마을까지 뱃길로 운송되었다. 비신은 사각 받침돌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비문은 조진관 홍문관 제학이 적었고 글씨는 이익희 동부승지가 썼다. 앞면에 새긴 비의 명칭은 당대의 명필 이조원 이조판서의 글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비에서 가장 돋보이는 글이 비석 맨 위에 있는 '조선 충신'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충신이 태어났지만 비문에 '조선 충신'이라는 글을 새긴 비석은 원강서원 뿐이다. 릴게임 따라서 이 비를 통해 당시 조정에서 충의공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진 후에도 충의공은 순조 33년(1833) 공조참판에서 공조판서로 증직되었다. 또 고종 33년(1896)에는 '충의' 시호가 내려졌고 광무 14년(1900)에는 '불천위' 위패를 받게 됐다. ▲ 절개를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는 상절당(象節堂)은 원강서원에서 향제가 열리는 건물로 충의공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상절당에 모셔져 있는 충의공 위패. 충의공은 이런 영광을 현재 산소가 있는 영월에서도 누리고 있다. 영월에는 매년 향사를 올리는 창절사와 배식단이 있다. 이중 창절사는 숙종 11년(1685) 세워졌는데 매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등 단종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향제를 올리고 있다. 배식단은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단종 죽음에 분노해 세상을 등진 3명의 충신을 위해 향제를 올리고 있는데 충의공이 김시습·남효은과 함께 이에 포함되어 있다. 영월에 있는 충의공 산소 역시 후손의 지극한 효성을 보여준다. 영월읍 팔괴로 인근에 있는 이 산소는 2003년 11월 공사를 시작해 다음 해 3월까지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산소 크기나 형태가 흡사 왕릉처럼 보인다. 산소는 김삿갓 면으로 들어가는 팔괴로 오른편에 있는데 길 왼편에는 '충신 엄홍도 묘 입구'라는 글이 새겨진 큰 기둥돌이 있다. 기둥돌 옆에는 '내 고장 역사 인물'이라는 충의공 일대기가 적혀 있는 비문이 있는데 이 비는 1999년 영월군수와 영월 문화원장이 세웠다. 이 비 옆에는 산소를 조성하는데 힘쓴 충의공 22세손 엄태우(嚴泰又)의 기적비(記績碑)도 있다 체리마스터 pc용 . 산소는 이곳에서 찻길을 건너야 있는데 찻길에서 산소까지 오르는 돌계단이 경사지고 높다. 계단이 많고 경사가 급하다 보니 산소까지 도착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계단 중간에는 양옆으로 '충(忠)'과 '신(信)'을 새긴 돌이 서 있고 이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길 양편에 사자상도 보인다. 산소는 이곳에서 좀 더 올라야 도착할 수 있다. 계단이 끝나는 지。에는 아름다운 석등이 잔디 위에 있다. 석등 앞에는 '충의공의 묘'라는 글과 함께 충의공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대리석이 있다. 석등을 지나면 양편에 문인석이 보인다. 산소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고 산소 앞에는 대리석 상석도 보인다. 산소 앞에는 두 개의 돌거북이 있는데 거북 등에는 충의공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이 있다. 원강서원은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향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나무는 산성에 있었던 원강서원이 이곳으로 이건할 때 심완구 전 울산시장이 직접 서원을 찾아와 심었다. 공교롭게도 심완구 전 시장 어머니 엄복순은 온양 엄씨로 충의공 17세손이다. 온양에서 성장했던 엄씨는 대현면에서 큰 배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던 심종근에게 시집왔다. 부잣집 며느리로 살았던 엄씨는 나중에 심 전 시장이 야당 생활을 할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힘든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심 전 시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 정무부시장이었던 엄창섭도 온양 출신이다. 문중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산성에 있었던 서원을 이곳으로 옮기는 데는 엄 전 부시장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나중에 울주군수로 출마해 당선이 되었던 엄 전 부시장은 이후에도 원강서원 향제가 열릴 때면 빠짐없이 참석했고 또 군수를 그만둔 뒤 서울로 갔지만 요즘도 향제가 열릴 때면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사라져가는 효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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