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주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열병식은 현대전의 트렌드를 여실히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8월 24일(이하 현지 시간) 우크라이군이 선보인 퍼레이드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날 무인 차량이 오열을 맞춰 도로를 달렸고, 수많은 드론이 하늘을 수놓았으며, 키이우를 흐르는 드니프로강에선 무인 보트가 질주했다. 열병식 자체가 무인 무기로만 치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번 열병식에서 선보인 무인 무기는 무인 지상 차랑(UGV)만 봐도 다종다양했다. 우선 물자를 실어 나르거나 부상병을 후송하는 UGV는 물론, 기관총·기관포를 실어 근접 전투를 할 수 있는 모델과 대전차 무기 및 로켓탄을 탑재한 화력 지원용 모델이 눈에 띄었다.
근접 전투 로봇부터 드론 모기(母機)까지
여기에 각종 센서를 붙여 적 드론을 격추할 수 있는 '무인기 잡는 무인 무기'도 식별됐다. 키이우 하늘에는 최근 러시아를 상대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장거리 자폭 드론이 등장했다. 전선 후방 100~200㎞의 러시아 보급 트럭이나 선박에 큰 타격을 입히는 이동 표적 타격용 무인 공격기와 무인 폭격기, 드론을 여러 대 실은 대형 드론 모기(母機)도 위용을 뽐냈다. 미사일·드론을 탑재한 무인 전투용 보트와 자체 방공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대형 무인 수상정도 드니프로강에서 수상 열병식을 가졌다.
이들 무기는 최전선에서 인간 병사가 하던 거의 모든 임무를 원격 조종, 또는 AI 통제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최근 우크라이나 전장 최일선에선 사람보다 드론이나 로봇을 더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증언도 많이 나오는 실정이다.
세계의 이목은 이처럼 우크라이나가 자랑한 다양한 드론에 쏠렸다. 그런데 무인 무기 개발과 실전 투입 면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우크라이나가 최근 '군 드론화'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는 .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군부 실권자인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전 총사령관과 드론 혁신을 주도했던 미하일로 페도로우 전 국방장관이 갈등 끝에 모두 해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드론 무기로 인간 병사의 역할을 모두 대체할 수 있다"는 입장인 페도로우는 러시아의 침공 이후 디지털전환부 장관으로서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에 큰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대표 사례가 정부가 만든 텔레그램 챗봇을 통해 일반 시민들로부터 주변 러시아군을 촬영한 사진·영상을 제보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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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민으로 위장해 역정보 공작을 펴는 것을 막고자 디지털전환부가 미리 구축한 공공 행정망 '디아(Diia)'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본인 인증을 거치도록 했다.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개전 초 우크라이나 보병들이 '재블린'이나 'NLAW' 같은 휴대용 대전차 무기로 무장한 채 러시아군의 예상 이동 경로에 숨어 있다가 기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우크라이나가 8월 24일(현지 시간) 수도 키이우에서 독립 35주년 기념 무인 무기 열병식을 가졌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제공
우크라이나군 디지털화 주도한 30대 장관
1991년생인 페도로우는 자포리자국립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드론 기술'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선 후보 캠프에 몸담은 인연으로 대통령 보좌관을 거쳐 2019년 28세 나이로 '혁신·교육 개발·과학 및 기술 담당 부총리 겸 디지털전환부 장관'으로 파격 발탁됐다. 페도로우는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행정을 처리하는 나라'를 기치로 내세워 공공 서비스 디지털화를 추진했다. 20대 장관이 추진한 정보기술(IT) 정책이 개전 초 러시아군의 파죽지세 진격을 막는 데 기여한 것이다.
디지털 정책 총책임자였던 페도로우는 드론과 인공지능(AI) 무기 도입도 주도했다. 서방 세계가 선심 쓰듯이 보내주는 소량의 전차나 장갑차, 야포로 러시아군과 대등하게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디지털전환부는 글로벌 모금 플랫폼을 만들어 전 세계에서 막대한 기부금을 끌어모았다. 이 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중국산 상용 드론 및 부품을 대량 조달해 전선에 보급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페도로우는 드론 관련 규제와 세금 제도 역시 완전히 바꿨다. 이에 따라 전시 우크라이나에서 드론 완성품과 부품에 부과되는 관세 및 부가가치세가 면제됐다. 각종 규제가 완화되자 스타트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조달 사업은 물론, 일선 야전 부대에도 직접 드론을 납품할 수 있게 됐다. 장거리 타격 드론을 여럿 출시해 러시아를 괴롭히는 '파이어 포인트', 저가형 요격 드론 스팅으로 중동 수출 길을 연 '와일드 호넷' 등 우크라이나의 드론 기업 상당수가 디지털전환부의 지원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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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도로우표 드론 혁신은 결과적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고 반격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제 여러 전선에서 러시아는 공격자가 아닌 방어자로 전락했다. 전선에서 수백㎞ 떨어진 러시아의 전략 시설마저 드론 공습으로 파괴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이 드론 카메라로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러시아군 전사자만 매일 1000명이 넘는 실정이다.
2019∼2025년 디지털전환부를 이끌며 전쟁 수행에 기여한 페도로우는 올해 1월 35세 나이로 국방장관이 됐다. 100만 대군을 총괄하는 전시 우크라이나의 최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취임 직후 페도로우는 우크라이나군에 대한 고강도 감사를 지시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3000억 흐리우냐(약 9조3000억 원)에 이르는 '불필요한 지출'이 확인됐고, 이에 연루된 국방 관료와 고위 군 장교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페도로우는 군부와 갈등을 빚었다.
국방장관으로서 페도로우는 "현대전 양상이 드론 전쟁으로 바뀐 만큼 대규모 추가 병력 동원은 필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따라 최전선 장병의 의무 복무 기간을 단축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감축하고 이들의 급여를 기존 3배로 인상하는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는 군권을 장악한 시르스키 전 총사령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거센 반발에 가로막혔다.
우크라이나가?수상 열병식에서 선보인 무인 보트 마구라(MAGURA) MV11. 우크라이나 국방부 제공
수도 키이우 지키고 전황 뒤집은 최선임 제복군인
옛 소련군에서 장교로 임관한 시르스키 대장은 우크라이나군의 명장으로 꼽힌다. 돈바스 전쟁 때부터 명성을 날린 그는 이번 전쟁이 발발하자 지상군 사령관으로서 러시아의 진격을 저지했다. 개전 초 키이우 방어전에선 자신의 병과 특기를 살려 포병부대를 직접 지휘해 러시아군 기갑부대를 궤멸했다. 이어서 고속 기동전을 펼쳐 러시아군 전차와 장갑차 수백 대를 노획하고 동부전선의 전황을 뒤바꿨다. 2024년 9월 젤렌스키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해임된 발레리 잘루즈니 대장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이 된 시르스키는 지난 2년 동안 우크라이나군 최선임 장교로서 전쟁을 지휘해왔다.
올해 상반기 '드론 대부' 페도로우와 '수도를 지킨 명장' 시르스키가 군 개혁을 놓고 맞붙으면서 우크라이나군은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결국 페도로우가 국방장관에서 해임됐는데 이에 대한 반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시르스키도 총사령관에서 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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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시르스키는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 현역 대장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방대 박사과정에 입학해 우크라이나군 고문을 맡은 상태다. 시르스키의 뒤를 이어 총사령관에 오른 미하일로 드라파티 장군은 소장 계급이고, 예우헨 흐마라 신임 국방장관도 장관 취임 직전 소장으로 전역했다. 시르스키는 우크라이나군 최선임 장교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지에선 이번 무인 무기 열병식을 놓고 시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군부 핵심 인사들이 "페도로우가 없어도 드론 전력 유지에 이상이 없다"는 메시지를 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시르스키가 페도로우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드론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드론이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국에서 페도로우의 국방장관 복직과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하자 총사령관 취임 후 처음으로 현지 언론에 기고를 하고 나섰다. 여기서 그는 "내가 들은 가장 이상한 비난은 '시르스키는 드론으로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라면서 자신이 우크라이나 무인시스템군 창설과 드론 사용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드론 만능론'을 경계했다.
"최근 전장에서 드론이 가장 많은 전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효과적인 드론 작전을 위해서는 포병과 박격포, 공병, 방공, 전자전 등 수십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적, 특히 우세한 포병·항공·보병을 갖춘 상대에 맞서 100만 군대를 단 두 달 만에 모두 드론으로 바꾸고 '이제 드론만으로 싸우겠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모험이다. 영토와 국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실험이라는 얘기다."
무인 무기가 사람 대체하는 '특이。' 올까
UGV가 적진으로 돌격해 참호를 소탕하고 무인 보트는 적 군함을 스스로 발견해 공격하는 시대다. 그래서 시르스키의 주장은 시대에 뒤처진 '꼰대'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일선 장교, 이들과 교류하는 군사 전문가 사이에선 시르스키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도 적잖다. 전자전·사이버전으로 무인 무기가 곧잘 무력화되는 현실을 숱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드론이 무기체계 개발의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아직 누구도 무인 무기가 사람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확신하진 못한다. 인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 전 전장에서 기계가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는 특이.을 목격할까.
이일우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놓고 시르스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