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세석대피소에서 영신봉 방향으로 걷다 만난 이름없는 봉우리에 앉았다. 하늘과 구름, 푸르른 지리산의 모습을 내다보며 그림을 그려본다.
정유진
빠르고 압축적인 산행이 유행이다. 최단 코스로 정상에 올라 인증샷을 남기고, 곧장 하산해 짧은 기록을 세우는 데 몰두한다. 언제부턴가 산행이 밀린 숙제를 해치우는 일처럼 느껴졌다. 산행 기록 앱에 찍힌 궤적은 늘어갔다. 하지만 정작 산을 다녀온 뒤 머릿속에 남는 풍경은 바닥의 돌들과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남는 것 없이 속이 텅 비어가는 기분이었다.
바쁜 일정과 무의미한 이동에 싫증이 났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산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무거운 박배낭은 대피소에 내려놓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주변을 느릿느릿 들여다보기로 했다.
산을 세밀하게 관찰할 도구로 '그림'을 택했다. 그림을 그리려면 대상을 집요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풍경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붓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림은 발걸음을 늦추고 산을 유심히 보게 할 좋은 핑계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여유를 부리기에 1박은 촉박했다. 산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비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 같은 대피소에서 2박을 하는, 이른바 '연박 산행'을 결정했다.
그렇게 지리산 세석대피소에서의 2박3일 화첩기행이 시작되었다.
거림탐방지원센터에서 세석대피소로 오르는 길 초입. 얇고 곧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산죽이 그 아래를 채운다. 평탄한 오르막이 내내 이어지는 걷기 좋은 길이다.
가장 분주한 곳에서 정지하기
지리산을 고른 이유는 명확했다. 지리산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넓은 국립공원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함양군, 산청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구례군, 전북특별자치도의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다. 산세가 깊어 높은 곳에 올라서도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다. 산속 깊숙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산의 정중앙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물을 많이 가진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의 골짜기들은 남해 바다에서 오는 수증기를 가장 먼저 품었다가 쏟아내며 수많은 계곡과 폭포를 만들어낸다. 물이 있는 곳에 식물이 자란다. 식물이 있는 곳에 곤충이 살고 동물이 찾아온다. 동물이 사는 곳엔 사람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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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이야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물이 많은 지리산에 이야기가 많아진 이유다.
촛대봉 하산길 바라본 세석대피소의 모습. 세석평전이 포근하게 대피소를 품고 있다.
지리산 7개 대피소 중 세석을 고른 이유도 명확했다. 세석대피소는 '쉬기 좋은' 대피소라는 타이틀과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지리산 종주객들에게 가장 '바쁜' 경유지이다. 주능선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세석은 어떤 코스로 걷든 갈 길이 먼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다들 부지런히 밥을 짓고, 서둘러 짐을 꾸려 쫓기듯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난다.
다들 바쁘게 떠나는 그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가만히 머물러 보고 싶었다. 스쳐 지나가는 1,500m 고원의 풍경을 여유롭게 누리기에 세석평전은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거림에서 세석으로 올라 두 밤을 보내고 청학동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이튿날에는 주능선을 따라 벽소령대피소 방향으로 영신봉, 칠선봉 탐방을 계획했다.
이튿날 주능선 산책길에 맞이한 바윗덩어리. 걸터앉아 물 한모금 마시며 쉬어간다.
상처를 딛고 일어선 푸른 바다를 만나다
산행은 경남 산청군 거림계곡 끝자락, 거림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되었다. 거림길은 세석대피소까지 가장 쉽고 편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6km 정도 되는 완만한 오르막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다. 오르는 내내 숲으로 우거진 길이라 더위를 피해가기도 좋다. 쉬운 길이라한들 1,500m까지 고도를 올려야 한다. 평소라면 숨 가쁘게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석에 도착한 뒤 서둘러 떠나야 할 다음 목적지가 없으니 발걸음은 한없이 느긋해졌다.
촛대봉 일출 풍경. 구름이 짙게 덮여 동그란 해는 보지 못했지만 겹겹이 쌓인 푸르른 능선을 한동안 구경했다.
쫓기듯 바닥만 보고 오를 땐 들리지 않던 계곡의 물소리가 귀에 닿았다. 고도를 높일수록 서늘해지는 숲의 바람이 느껴졌다. 천천히 움직이니 숲의 작은 것들이 다정하게 눈길을 끌었다. 나무에 핀 버섯과 바위를 덮은 이끼를 구경하며 거북이처럼 산을 올랐다.
세석대피소 도착 직전의 500m는 걷기 편한 능선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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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어깨를 두드리며 오른 이를 반긴다. 이 환영의 길을 지나고 나면 마침내 대피소 건물이 보인다. 구상나무가 푸른 바다처럼 펼쳐진 세석평전이 그 앞을 채운다. 평원의 푸르름이 바람에 휘날리며 일렁였다.
세석평전
세석대피소 앞의 빼곡한 고원 습지는 뼈아픈 상처를 이겨낸 결과다. 1970~1980년대 세석평전은 무분별한 야영으로 흙이 훤히 드러날 만큼 심각하게 훼손되었었다. 생태계가 무너지자 국립공원은 1990년대 후반부터 야영을 전면 금지하고 복원에 나섰다. 출입을 통제하고 묘목장에서 키운 구상나무를 직접 심고 보살폈다. 20년 전만 해도 훼손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10년 전부터는 생태가 회복되어 현재의 푸른 고원 습지로 되살아났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지리산 풍경에 자리를 바꿔가며 일출을 즐겼다.
파랗던 산들이 초록색을 입는 순간
이튿날 새벽, 어둠을 뚫고 촛대봉으로 향했다. 대피소에서 20분 남짓한 완만한 오르막이다. 평소 종주 길이었다면 일출을 보자마자 배낭을 둘러메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 하루 온종일 쉴 수 있는' 베이스캠프가 있는 오늘은 다르다. 일출이 끝나면 또 다시 움직여야 했던 날들과 달리 평온한 기운이 여명을 반겼다.
그 안도감은 촛대봉의 일출 풍경을 더 오래, 더 깊게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쫓기는 마음이 사라지자 그림 그리듯 풍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산의 색이 더 세밀하게 분리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 트기 전, 지리산의 겹겹이 쌓인 능선들은 온통 파란색이었다. 창백한 코발트블루부터 묵직한 네이비, 옅은 하늘색까지. 산맥은 다양한 파란색의 스펙트럼으로 층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천왕봉 너머로 해가 솟아오르며 하늘이 밝아왔다. 파란색의 능선들이 。차 초록빛을 띠었다. 연두, 카키, 짙은 녹갈색으로 능선들이 색을 바꿨다. 온통 파랗던 바다 같은 풍경이 초록색으로 뒤덮이자 아침이 밝았음이 느껴졌다. 눈앞의 거대한 풍경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색을 바꿔가는 과정을 바위 꼭대기에 앉아 구경했다.
돗자리 펴고 앉아 지리산을 그려보았다. 지나가던 탐방객이 말을 걸었다.
움직이지 않고 멈추자, 발견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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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저쪽에 쉬기 좋은 봉우리들이 몇 개 있어요! 올라가서 그림 그려요."
봇짐을 메고 소풍에 나섰다. 배낭 안에는 작은 물병 하나, 그림 그릴 간단한 도구들과 아침에 만든 샌드위치가 들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영신봉 방향으로 향한다.
세석대피소에서 칠선봉까지는 약 2km. 반나절 나들이 다녀오기 딱 좋은 거리다. 칠선봉을 향하는 길목, 벼랑 끝 너른 바위에 돗자리를 폈다. 절벽 아래로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가 뻗어 있었다. 빼곡한 구상나무 사이사이 바위들이 끼어 있었고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배낭을 풀고 펜을 꺼내들었다.
시모 작가는 붓펜으로 지리산을 그렸다. 나무와 바위의 질감을 종이 위에 옮겨 그렸다. 붓펜으로 그리는 자연은 마치 조각칼로 나무판을 파내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울퉁불퉁, 빛이 만들어내는 명암이 느껴졌다.
그림 경험이 별로 없는 나는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내려다만 보았다. 자연물은 특히 그리기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색의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이 나무고 어디부터가 저 나무인지. 능선의 끝은 어떻게 그려야 하며 흩어진 구름은 어떻게 묶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다 결국 펜을 들어 마음대로 선을 그었다.
지리산의 풍경은 대체로 파스텔톤이었다. 쨍하기보다 은은했다. 수채화 물감에 물을 많이 섞어가며 하얀 종이를 채워 나갔다.
붓을 쥐고 앉아 들여다보니 지리산의 작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로 뭉쳐 보이던 숲에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생김새가 보였고 바위 표면의 거친 결과 그 틈에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구름이 흘러가는 방향과 안개가 꼈다 사라지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안개가 지리산 능선 전체를 덮었다 열었다 한다.
종이에 선을 긋는 일은 눈이 아닌 손으로 지리산을 직접 만져보는 것과 같았다. 압도적으로만 느껴졌던 자연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떤 산이든 이렇게 한 자리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 산을 좀더 제대로 만나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마저 산을 이해하는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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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넘나드는 구름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과학 실험을 구경하는 것처럼 신기했다. 한창 집중해 종이를 내려다 보다 고개를 들면 갑자기 안개가 밀려와 풍경을 온통 새하얗게 가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조금만 기다리면 산은 안개를 걷어내고 제 모습을 다시 보여 주었다. 잠시 멈춰 기다리면 자연은 어김없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돌려 준다는 이치다. 이 작은 기다림은 마음속 단단한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구름은 햇빛이 뜨거울 때쯤 그늘을 만들어주고 으슬으슬 추워질 때쯤 다시 온기를 보내주었다. 부드러운 능선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리니 아, 이보다 평화로울 수 있을까.
세석대피소로 돌아오는 길 꽃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노곤함에 스르륵 잠에 들 뻔했다.
산이 내어준 진짜 휴식
세석에서의 이틀은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과정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니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산의 얼굴이 보였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는 한낮이 되자 뜨거운 뙤약볕으로 바뀌었고 소란스럽던 아침 새소리가 들리던 자리에는 어느새 고요한 바람 소리가 채워졌다. 산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끊임없이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쫓기듯 걷는 산행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대피소 풍경에 떠나기가 아쉽다. 풍경과 함께 정이 든 대피소 팀장과 직원들이 인사의 말을 건넨다.
"다음에는 놀러와서 네 밤, 자고 가요!"
우리는 웃으며 '꼭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다음날 아침, 느긋하게 짐을 꾸려 청학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이전의 하산길과 달랐다. 쫓기듯 내려가던 발걸음 대신 단단한 여유가 묻어났다. 돌아보는 세석의 풍경은 마치 집을 떠나듯 애틋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붓을 든 지리산에서의 2박3일, 멈춰야 내어주는 산의 진짜 휴식을 세석평전에서 배웠다.
지리산 연박 tip
▶ 지리산 대피소는 월간 최대 4일까지 대피소 이용이 가능하다. (연박으로도 가능)
▶ 연박할 경우 짐을 대피소 중앙 공간 한켠에 두고 산행을 다녀오는 것이 가능하다.
▶ 낮 시간대(퇴실~재입실 사이)에는 대피소 청소 작업이 진행되므로 실내 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
▶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는 대피소에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쓰레기 담을 봉투를 여유 있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거림탐방지원센터.
1일차 세석으로 in (거림~세석대피소) 6km,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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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림탐방지원센터~천팔교~1400고지 쉼터~세석대피소
거림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대피소 이용객의 경우 동절기 14시, 하절기 15시 이전에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대피소 예약이 없는 당일 산행객의 경우 동절기 12시, 하절기 13시 이전으로 산행 출발시각이 제한된다.
탐방로 앞구간은 걷기 좋은 흙길이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솟은 나무들과 수량이 풍부한 거림계곡이 산행 내내 함께 한다. 북해도교 이후로 가파른 오르막길이 한 시간 정도 이어진다. 이 구간만 통과하면 세석대피소까지는 더 이상 어려운 길이 없다. 도착 직전 500m 완만한 길이 있으며 이 길을 지나면 작은 식수대가 나오고 이어 세석대피소를 만날 수 있다.
2일차 세석 주변 나들이 4km, 6시간(휴식시간 포함)
세석대피소~영신봉~칠선봉~세석대피소
세석대피소에서 칠선봉까지 약 2km, 다시 세석대피소까지 돌아오면 4km가 된다. 영신봉까지 500m에 잠깐의 오르막을 제외하면 대체로 걷기 좋은 숲길이다. 능선길이라 조망.도 종종 등장해 지루하지 않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중간중간 쉬어갈 만한 공간들이 있으며 국립공원공단에서 설치한 베어벨도 심심치않게 마주칠 수 있다.
천팔교.
3일차 세석에서 out (세석대피소~청학동) 10km, 6시간
세석대피소~의신갈림길~돌문~삼신봉~청학동탐방지원센터
세석평전을 떠나 남부능선에 접어든다. 거대한 거암 사이를 지나는 돌문이 이 길의 주요지.이다. 7km쯤 지.에 삼신봉은 갈림길에서 잠시 빠져나와 오를 수 있다. 지리산 주능선(노고단~천왕봉)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남부능선 최고 전망대다. 삼신봉 이후로는 흙길과 돌계단이 섞인 산행을 마무리하는 편안한 하산 구간이다.
*세석대피소에서 삼신봉까지는 인적이 드물어 탐방로가 험한 편이다. 정비가 잘되어 있지 않아 길을 잃기도 쉽다. 표지기나 길의 흔적을 유심히 살피며 하산해야 한다. 또한 산죽이나 잡목이 많아 긴바지가 필수다.
세석대피소 직전구간.
돌문.
조망..
삼신봉.
낙남정맥洛南正脈
낙남정맥은 한반도의 뼈대인 백두대간에서 마지막으로 갈라져나오는 산줄기다. 낙동강 남쪽을 가르는 정맥으로 그 시작.이 바로 지리산 주능선의 영신봉(1,652m)이다. 영신봉에서 시작된 능선은 남쪽으로 뻗어 나가며 지리산 남부능선의 핵심 거。인 삼신봉을 잇는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는 곳엔 사람도 살